우리의 미래는 거기뿐일까?
얼마 전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서 한 식당에 들어갔습니다.
제가 앉은 바로 옆자리에는 70이 넘어 보이는 노인 3명이 찌개를 앞에 놓고 소주를 마시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7시 가까이 되자 TV에서 뉴스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눈치였습니다.
뉴스가 거의 끝나가는 데도 그분들이 기다리는 소식이 나오지 않는지 매우 실망하면서 “우리나라 방송이 그렇지 뭐.” “좌빨한테 다 먹혀서.” 등등의 불만을 쏟아 냈습니다.
그러면서 미국의 대통령선거가 부정선거여서 선거를 다시 해야 한다는 둥, ‘트럼프가 하원에서 투표로 다시 대통령에 선출이 될 것이다.’ ‘오늘의 연설을 보고 나는 트럼프가 대통령이 될 것을 확신했다.’ 등등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시점은 트럼프와 극렬지지자를 빼고는 바이든의 당선을 인정하는 분위기였고 이미 정권인수를 시작하고 있었던 상황인데도 그분들은 그때까지도 그런 소리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답답한 마음에 밥맛을 잃어 식당을 나와버렸습니다.
저분들이 트럼프를 알면 얼마나 알 것이며, 트럼프라는 인간이 끼친 인류사적 해악을 알면서도 과연 저런 소리를 할 수 있을까? 라는 의문과 더불어 미국의 대통령선거가 부정선거였다고 주장하는 자들의 허황된 ‘증거’들을 보면서도 저런 소리를 할까?
더불어서 지난 4월에 치러진 우리나라의 국회의원 선거도 ‘유례없는 부정선거’였다고, 아직까지 주장하고 있는 덜떨어진 자의 말을 맹신하고 있는 현실을 보면서 우울하기 그지없었습니다. 다음 날 인터넷에서 뉴스를 보다가 트럼프가 그 노인들이 말했던 내용의 연설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근거도 빈약하고 허황된 주장뿐이었던 연설이었다는 것이고요.
어제 식당에서의 그분들은 그런 소식이 TV 뉴스에서 방영될 것을 기대했던 모양입니다.
그분들의 나이는 어림잡아도 70은 훨씬 넘었고 80 가까이 되어 보였습니다.
인생이 80 가까이 되면 그동안 보고, 듣고, 깨닳은 것들이 얼마나 많을까요?
비록 많이 배우지는 않았더라도 나름대로 세상을 바라보는 잣대나, 옳고 그름을 판별하는 지혜가 없다고는 못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노인들을 공경하고 그들의 지혜를 빌리려고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정작 그분들은 허황된 주장에 현혹당해서 ‘확증편향’만을 굳히고 세상과 담쌓고 살아가면서, 자신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 사람들을 ‘증오’하는 것으로 일생을 마친다면, 우리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사회발전에 어떤 도움이 되겠습니까?
‘노인 한 분이 돌아가시면 도서관 하나가 사라진 것과 마찬가지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요즘과는 좀 다르기는 하지만 과거에는 농사를 비롯한 생산 활동, 아이들 교육 등 노인의 경험과 지식은 공동체를 유지 시키는 필수 요소였습니다.
요즘도 오랜 경험과 세상 풍파를 겪으면서 체화된 삶의 지혜는 젊은 사람들이 따라가기 어렵습니다.
물론 그분들이 그렇게 된 것은 그들과 소통하지 못하고 그들만의 영역에 ‘방치’한 책임도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발달 된 현대문명이 오히려 그분들을 자신들만의 사고에 매몰시키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 합니다. 유투브,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등의 소위 SNS는 그분들이 밖으로 나오지 않고, 그 영역 속에만 머물러도 충분히 세상과 소통하고 있다는 착각을 일으키게 합니다.
그분들의 카톡에 어떤 소식들이 들어있을지는 ‘안 봐도 비디오’일 것입니다.
유투브에서 온갖 종류의 ‘가짜뉴스’를 만들어 뿌리면서 ‘후원’이라는 이름의 ‘코인팔이’를 하는 자들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이제라도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고 그분들과의 ‘진정한 소통’을 위한 노력을 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같은 공동체의 일원이고 누구 한 사람도 소중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향한 ‘분노와 증오’는 때때로 세상을 폭발적으로 발전시키는 한 요인이기도 하지만 일상화된 분노와 증오는 ‘질병’일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