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운 지인이나 친구, 혹은 각종 이유로 누군가를 만나게 될 때 개인적으로 가장 선호하는 장소는 출판단지이다. 출판단지는 그 나름의 정취가 있다. 파주로 이사를 온 후, 한동안은 비만 내리면 출판단지로 달려갔다. 사방이 책으로 둘러쌓인 지혜의 숲에 앉아 비내리는 풍경을 보고 있노라면 아무 이유없이 감정이 휘몰아치고 다른 세계에 와 있는 것 같은 몽환적인 느낌을 받곤 했다. 내 안의 또 다른 나를 깨우고 영감을 주는 장소가 이곳이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든다. 그래서 언젠가 이곳에 창이 큰 그림 작업실을 가지는 꿈을 꾼다. 이곳은 시간이 느려지다 결국 멈춘 것 같은 쉼표의 느낌이 있다. 그래서 멀리서 나를 보러오는 누군가를 만날 때는 항상 이곳을 선호하게 된다. 그리고 그때마다 거르지 않고 방문하는 괜찮은 갤러리들이 있다. 그 중 한곳을 소개하고자 한다.
갤러리 끼(Gallery KKI)는 아트 디렉터이자 배우인 이광기 대표가 2017년 파주시 문발(文發, 문화가 피어오르는 곳)에 설립하였으며, 2022년 용산에 두 번째 공간을 개관하여 운영중이다.
지금 이 곳에서 꽤 볼만한 전시가 열리고 있다. 시인 이상과 화가 김성룡의 작품을 매칭한 전시 ‘오감도, 그리오’가 바로 그것이다. 김성룡이라는 이름은 전혀 기억에 없는데, 그림은 어디선가 본 기억이 있는 그림이었다. 내가 이 강렬한 그림을 어디서 봤더라 한참 기억을 더듬다가 정기구독 하던 미술잡지 ‘PUBLICART(퍼블릭아트)’를 뒤적여보았다. 그리고 찾아서 그림도 보고 기사도 한번 더 읽어보았다. 읽다보니 갤러리 끼의 전시기획이 더 궁금해졌다.
전시기획은 예술과 대중을 이어주는 매개체 역할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수의 전시들이 그림의 나열인 경우가 많다. 작년에 대형 갤러리에서 정말 좋은 작품들을 봤는데 작품에 비해 기획이 너무 형편없어 집으로 오는 내내 실망을 넘어 분노했었다. 반면, 오래전에 관람한 마크로스코(추상 표현주의 예술가)의 기획전은 너무 감동스러워 지금도 그때를 생각할때면 그 공간으로 소환되어 먹먹해 지는 느낌을 받는다. 이처럼 전시기획은 보이지는 않지만, 대중에게 미치는 영향은 크다. 작년에 갤러리 끼에서 기획한 <들숨,날숨 인간의풍경> - 관심있으신 분들은 인터넷으로라도 꼭 찾아보시길 바란다 –도 개인적으로 너무 좋은 전시였다고 생각한다. 그 전시에 감동을 받아 지난달 6월에 인사동에서 열린 박치호작가의 <무심한몸들> 개인전을 다시 보고 왔다. 그 때 집으로 돌아오면서 이런 생각을 했더랬다. ‘이렇게 번거롭게 서울까지 나가지 않아도 수준높은 전시를 제공하는 갤러리 끼가 가까운 곳에 있어서 너무 좋다.’ 오래도록 갤러리 끼가 우리 지역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본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민들이 관심을 가지고 지속적인 방문을 해야 갤러리 끼에서 열리는 전시가 더 다채롭고 풍성해질거라 생각한다.
파주 갤러리 끼 – 서촌 이상의 집 공간 콜라보
그럼 본격적으로 현재 전시중인 김성룡 작가의 ‘오감도, 그리오’전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어떻게 시인 이상과 화가 김성룡의 작품을 매칭시킬 생각을 했을까? 이번 기획은 미술평론가 안현정씨과 갤러리 대표 이광기씨 두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한 결과 나오게 된 기획이라고 한다. 그림이 풍기는 환상적 초현실주의에 초점을 맞춰 생각하다 보니 어느 순간 번쩍, 시인 이상이 떠올랐다고. 덧붙여 갤러리끼의 이광기 대표는 이 전시를 통해 단색화와 추상화에 치우쳐 있는 지금의 현대미술을 환기해 보고자, 김성룡 작가의 작품을 선택했다고 한다. 또한 “이번 전시는 예술의 경계를 넘나드는 새로운 시도로, 관람객들에게 창의적인 영감을 전하고자 한다”며, “시인 이상과 화가 김성룡의 만남은 융합과 창작의 시대를 여는 독특한 사유를 제시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성룡의 작품은 파주 갤러리 끼에서 28점, 서촌 이상의 집에서 소품 2점의 작품으로 만날 수 있다.
전시 제목인 오감도는 1934년에 조선중앙일보에 연재된 이상의 연작시다. 원래 30회를 연재 예정이었으나 독자들의 항의로 15회만에 연재가 조기중단 되었다고 한다. 많은 학자들이 현재까지도 연구중인 대한민국 최고의 난해시가 아닐까 싶다. '오감도'는 건축 용어인 '조감도'에서 한자의 글자 모양을 변형시켜 까마귀 '오'로 새롭게 만든 단어이다. 하늘에 있는 까마귀의 시선에서 세상을 바라본다는 의미이다. 고등학교 때 처음 접한 이상의 시는 특별한 느낌 없는 그저 난해함 그 자체였다. 그런데 전시장에서 만난 시제 1호의 “제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중략 제1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13인의아해는무서운아해와무서워하는아해와그러케뿐이모혓소....”라는 문장을 읽어 내려가는 순간, 텍스트가 입체 공간이 되어 내 앞에 펼쳐졌다. 캔버스속의 인물들이 모두 뛰쳐나오고 작품속의 배경이 주위를 감싸고, 하늘에는 까마귀 대신 작품속의 ‘매’가 공중에서 나를 내려다보는 환상의 초현실 세계가 눈에 보이는것만 같았다.
김성룡 작가의 그림은 파격적이다. 한번보면 잊을 수 없을 만큼 강렬하다. 이번 전시작은 인물화 위주의 작품이 많았는데 그림 속 인물들의 시선이 묘하게 마음에 들었다. 인물들은 모두‘여기’를 보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닿을 수 없는 세계 너머의 장소를 보는 듯하다. 작가는 이 세계와 저 세계 사이의 어딘가를 표류 중인듯하다.
갤러리 끼의 전시장은 입구로 들어가면 양쪽으로 나눠져 있다, 전시장 입구의 테이블위에는 작가의 많은 그림들이 파일에 넣어져 있고, 다양한 글들의 작가노트가 있다. 그림은 작가의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고 작가노트를 읽는다는 건 다른 세계로 잠시 여행을 다녀오는 것과 같다. 놓치긴 너무 아까우니, 지나치지 말고 관심있게 보는걸 추천한다.
각자만의 방식으로 난해함을 즐겨보자!
나는 전시장을 2번 방문했다. 오프닝 전날,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작품과 단 둘만 만나고 싶기도 했고, 사진을 찍기 위해서였는데 막상 전시를 보고나니 기획의도도 궁금했고, 이런 그림을 그리는 작가를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다음날 오프닝 행사에도 참석했다. 평론가와 이광기 대표, 작가의 이야기를 직접 들을 수 있어 좋았고, 날씨도 더할나위 없었다. 야외에서 제공된 환상적인 맛의 맥주와 음식을 먹으며 미술을 이야기 할 수 있는, 마무리까지 완벽한 시간이었다. 개인적으로, 전시를 관람할 때 궁금한점이 있거나 흥미로운 부분이 있으면 질문을 많이 하는편이다. 작가나 도슨트의 설명을 듣고나면 작품이 훨씬 다채로워 보이기도 하고 그림을 통해 세계가 넓어지는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궁금한점이 정말 정말 많았고, 맥주를 마시는 그 시간, 작가가 바로 옆테이블에 앉아 있었음에도 나는 아무 질문도 하지 않았다. 누가 그랬던가. 이상의 시는 해석하는 순간 이상의 이상다움은 없어지는거라고. 전시를 보는 내내 비슷한 생각이 들었다. 그림은 그 자체로 또 다른 언어인데, 그림이 우리의 언어나 우리가 가진 무엇으로도 완벽히 번역되지 않을 때, 우리는 그걸 ‘난해하다’ 라고 표현하는 것 같다. 그런 점에서 이상의 시와 김성룡 그림의 가장 큰 공통점은 ‘난해함’일 것이다. 나는 작가의 이런 난해함이 마음에 든다. 갤러리 끼에서 그림을 보며 각자만의 방식으로 그 난해함을 즐겨보길 바란다.
전시를 보고 나와 도서관으로 향했다. 이상의 오감도 전편을 다시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우리동네 도서관에 이상의 문학이 단 한권도 없었다. 이건 또 이것대로 충격이었다. 어쩔수없이 책배달을 신청했다. 내친김에 다음 독서모임의 책을 이상의 오감도로 정했다. 먼저 갤러리끼에서 만나 전시를 관람하고 근처 명필름아트센터(MFAC)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문학과 그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보기로 했다. 더운 여름, 전시 제목처럼 이렇게 ‘오감’을 자극하는 ‘오감도-그리오’전을 뜨겁게 추천한다.
갤러리 끼 파주
전시기간 2024.6.15 – 2024.8.3
전시장소 갤러리 끼 파주 (경기도 파주시 회동길 521-2)
관람시간 10:30-17:30 (일,월 휴관 12:00-13:00 브레이크타임)
관람료 무료
문의 031-8071-8822
이상의 집
전시기간 2024.6.15 – 2024.8.3
전시장소 서울 종로구 자하문로 7길 18
관람시간 10:30-17:00 (월 휴관 12:00-13:00 브레이크타임)
관람료 무료
문의 0507-1319-8374
글 손승희 시민기자, 사진제공 손승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