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을 형제로 둔 아이들은 남보다 빠르게 성장한다. 한창 조르고 응석 부릴 나이에 부모를 생각하고, 참는 법을 미리 배운다. 사십여 년 전, 지적 장애가 있는 누나를 둔 남동생은 연년생인 누나와 같은 해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그 애들이 5학년이던 어느 날, 한 학부모가 자기 아들을 데리고 집으로 찾아왔다. 남동생이 그분의 아들을 때렸다는 것이다. 유순하고 순종적인 성격이라 이런 일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엄마는 남동생을 야단치기에 앞서 이유를 물었다. 한없이 눈물만 흘리던 동생이 어렵게 꺼낸 말은 “저 애가 누나 도시락에 흙을 넣었어요. 누나한테 병신이래. 그런데 내가 어떻게 참고만 있어요.”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엄마는 미안하다며 남동생을 안고 엉엉 울었고 나는 방구석에서 숨죽이고 있던 여동생을 안고 서럽게 울었다. 이 오래되고 평생 잊지 못할 기억을 헤집어 낸 것은 최경희 선생님과 우연히 나눈 대화에서 비롯되었다. “한 사람이 할 몫을 셋으로 나눠 그 애들에게 가르치면 완벽한 한 사람 몫을 할 수 있어요.” 전혀 생각지 못한 곳에서 그 말을 듣는 순간, 특수교사로서 평생을 살아오신 선생님의 삶이 몹시 궁금해졌다.
지은영 : 특수교육을 전공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지요?
최경희 : 군인이셨던 아버지가 전역하시고 사업을 하시다가 사기를 당해 집이 많이 어려워졌어요. 대학에 합격했는데 학교에 다닐 형편이 못됐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공장에 다녔어요. 그때 교회에서 자원봉사로 유치부 아이들을 돌봐줬는데 그중 장애가 있는 아이가 있었어요. 자존감을 느끼도록 곁에서 용기를 주고 예쁘게 꾸며주었더니 그 애가 차츰 변화되는 게 보이는 거예요… 고등학교 졸업 5년 뒤, 아버지께 대학에 가고 싶다고 말씀드렸어요. 아버진 뭐가 되고 싶냐고 물으셨죠. 목사님이 되거나 장애인을 위한 특수교사가 되고 싶다고 말씀드렸더니 “목사보다야 교사가 낫다. 그거 하라우.” 하셨어요. 그게 계기가 되어 특수교육을 전공하게 되었고 임용고시를 통해 86년부터 특수교사로 일하게 되었어요.
지은영 : 특수교사로 처음 부임했을 때 가장 어려웠던 점은 무엇이었나요?
최경희 : 1986년, 일반 중학교에 특수학급 교사로 부임했을 때 특수교육에 대한 교장 선생님의 인식이 많이 부족하셨어요. 왜 이런 거 하냐는 질문을 수없이 받았죠. 체육관을 쓴다거나 집에 혼자 가는 연습을 시킬 때 특히, 지적을 많이 받았어요. 특수학급 구성을 위해 전교생 시험을 보자고 할 때도 교장 선생님을 설득시키기란 매우 어려웠죠. 시험을 보니, 자기 이름도 못 쓰는 아이가 10명, 장애가 있는 아이가 두 명인 거예요. 그렇게 총 12명의 학생과 특수학급 수업을 시작하게 되었어요. 그때는 특수교육이 기존교육에서 전혀 교육 효과를 볼 수 없는 학생들도 포함한다는 걸 모르실 때였으니까요.
지은영 : 발달장애 학생들을 위해 많은 일을 하신 거로 알고 있어요. 특별한 계기가 있으신가요?
최경희 : 특수학급을 구성한 후 아이들과 말로 표현하고 글로 쓰는 연습을 매일 하자는 약속을 했어요. 보통 중학교 정규 수업은 3시면 끝나요. 하지만 매일 두 시간 정도 남아 표현하는 연습을 했죠. 그중엔 말로 표현하는 걸 거의 못 하는 아이가 있었어요. 포기하지 않고 2년을 빠짐없이 교육했더니 어느 날 학부모가 펑펑 울면서 교실로 찾아오신 거예요. 아이가 KBS 방송에 나와서 인터뷰한다고요. 그동안 열심히 따라와 준 결과이니 이제 미래를 준비하자고 말씀드렸죠. 너무나 감사한 그 아이는 중학교를 졸업 후 고등학교에 진학했고 나중에 학생회장이 되었어요. 이처럼 발달장애 학생 중에 비교적 가벼운 ‘경계선'급의 경우, 반복 학습과 제대로 된 교육은 아이의 미래를 바꿀 수 있어요. 이 아이들은 교육을 통해 단순 업무를 배울 수 있고 사회에 나가 경제활동도 할 수 있어요. 바로 이점이 발달장애 학생들을 위한 ‘통합형 직업교육 거점학교’를 만드는 원동력이 된 거죠.
지은영 : 발달장애 학생들을 위해 그동안 어떤 일을 해 오셨나요?
최경희 : ‘통합형 직업교육 거점학교’는 고등학교 특수학급의 직업교육과 취업률 증가를 위해 2010년부터 2012년까지 매년 10개 학교를 선정해 진행한 사업이에요. 제가 근무했던 상암고도 2010년 교육과학기술부로부터 지정을 받고 지적, 자폐성 장애 등 발달장애가 있는 학생들에게 개인별 맞춤 진로교육과 현장 실습 중심의 직업교육을 했어요. 또, 대학 진학을 원하는 학생들을 위해 대학진학반을 운영했고요. 고3 학생들은 이력서, 자기소개서, 면접, 직장 생활 예절 등에 대한 개별 지도를 받았어요. 이를 바탕으로 서울시 교육청, 한국장애인고용공단 등과 함께 발달장애 학생을 위한 ‘구직역량 강화 프로그램’을 개발해 상암고뿐만 아니라 경기고, 동명여고, 둔촌고 학생들도 함께 교육했지요. 이 과정을 함께한 학생 중에는 이석현 전 KBS 아나운서도 있답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이들의 취업이었어요. 기업은 일정 비율 장애인을 의무 고용해야 하는데 이게 지켜지지 않는 거예요. 여러 기업을 찾아다닌 결과, 의류업체 유니클로에서 면접을 보러 오라는 통보를 받았어요. 그 아이들이 당당한 직장인으로 나서던 날, 학부모들과 함께 울었던 그때의 감동이 지금도 잊히지 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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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 사물놀이패 땀띠 공연장면> |
보통, 장애인들은 근무시간이 길지가 않아요. 하루 네다섯 시간 정도 일하고 귀가하는데 그 후 여가를 어떻게 보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 있었어요. 이들도 예체능을 맘껏 누리고 즐기자는 의도에서 만든 학교 프로그램 중 모둠북도 있었는데 지금은 유명해져 매스컴에도 자주 등장하는 장애인 사물놀이패 ‘땀띠’가 그때 만들어진 거예요. 직장에 다니면서도 ‘땀띠’ 나게 연습해 얼마 전 국립극장에서 창단 20주년 기념공연을 했답니다. 또 장애 학생들은 부모 도움 없이는 바깥 활동에 많은 제약이 있어요. 그런 이유로 학교에서 사생대회, 걷기 행사, 군부대 체험이라든가 숲 체험 등 체험행사를 많이 운영했지요.
혹시 ‘스페셜 올림픽’이라고 아세요? 지적, 자폐성 장애인이 참여하는 국제 스포츠 대회인데 패럴림픽은 많이 알려졌지만 이건 생소하실 거예요. 이 대회는 메달을 위해 혹독하게 훈련하지 않아요. 전 ‘누구나 승자가 될 수 있다’라는 걸 학생들에게 알려주기 위해 2011년, 그리스에서 열리는 이 대회에 참가했어요. 이제는 해마다 참가하는 국제대회가 되었고요. 그런데 2017년, 학생 행사를 준비하다가 뇌경색으로 쓰러져 심각한 언어 장애가 왔어요. 할 수 없이 정년 퇴임을 2년인가 앞두고 명예퇴직하게 되었죠. 쓰러지기 전까지 17년간 특수학급 교사협의회 회장을 맡으면서 아이들과 행복한 시간을 보냈네요. 지금도 그때 함께 했던 제자들이 자주 집으로 놀러와요.
지은영 : 앞으로 꼭 이루고 싶은 소망이 있다면 무엇인지요?
최경희 : 9년 전에, 언론에서 한참 논쟁이 되었던 발달장애 학생의 학부모들이 지역 주민과 비장애인 학부모들 앞에서 무릎을 꿇었던 사건을 기억하시나요? 2015년 제가 서울 성일중학교 부지 내에 ‘발달장애인 직업능력개발훈련센터’를 설립을 위해 일할 때 일어난 일이에요. 예전보다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많이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장애인을 위한 시설이 지역에 들어선다니 좋아하진 않으셨죠. 그때부터 전 기숙사형 장애인 학교를 설립하고 싶었어요. 장애인을 위한 학교는 학생들의 교육경험이 풍부한 교육자가 운영해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퇴직 후에 나의 이상을 펼칠 학교를 만들기 위해 여러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그렇게 쓰러지게 된거예요. 아직도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 못했어요. 하지만 꼭 그 꿈을 펼치고 싶어요.… 처음 교사를 시작했을 때 가르쳤던 학생들이 지금은 중년이 되었어요. 당연히 부모님들도 연로하시니 예전처럼 보살피기가 어렵죠. 부모님들이 늘 하시는 말씀이 “내가 이 애보다 하루 만 더 살고 죽어야 하는데…” 예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이들이 자존감을 가지고 당당한 사회의 일원으로 나아가도록 돕는 게 제가 부여받은 사명이 아닌가 싶어요. 각자가 한 사람 몫을 완벽하게 해내기보다 한 사람의 몫을 나눠 나눈 만큼만 아이들을 연습시키면 완벽한 한 사람 몫을 해낼 수 있거든요. 그러면 되잖아요.
지은영 : 마지막으로, 장애를 가지지 않은 분들께 부탁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해 주세요.
최경희 : 전 사실, 장애인이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아요. 그냥 다 같은 사람이잖아요. 이들을 볼 때 아주 불쌍하게 보는 분도 계시고 신기한 듯 빤히 쳐다보는 분도 계세요. 하지만 아무리 악의가 없는 행동이라 해도 아이들에겐 상처가 돼요. 자연스레 지나쳐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사십여 년 전, 그 일로 인해 나의 여동생도 특수학급이 있는 학교로 진학을 했다. 특수학급 선생님의 노력과 헌신은 동생에게 글을 읽는 기쁨을 알게 했고 혼자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사회활동을 할 수 있는 용기를 주었다. 완벽하지 않아도, 아주 느려도, 혹은 해내지 못해도 포기하지 않고 사회의 구성원으로 다시 키워내신 이 땅의 특수교사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