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열린사회와 그 적들’
“사회는 혁명이란 수단을 동원해 정해진 목표를 향해 일거에 발전하는 게 아니다. (칼 포퍼 Karl Raimund Popper (1902-1994) 열린사회와 그 적들 The Open Society and Its Enemies)”
백번을 양보해서 윤석열이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사고가 가능하고, 정상적인 인지능력을 가졌다고 인정한다면 이 한 문장만 제대로 읽고 의미를 이해했더라도 계엄이라는 ‘뻘짓’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다시 백번을 양보해서 윤석열에게 세상을 바꾸고, 개혁하고자 하는 선의가 있었다고 치면 그는 역시 포퍼의 이런 글들을 알고 이해했어야 했습니다.
“인간의 이성이 한계가 있기 때문에 서로의 비판을 허용하고 반증을 거쳐 점진적으로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한다”
“비판을 허용하는 열린사회는 서로 상충하는 의견이 자유롭게 표출되고 엇갈리는 목표들이 다양하게 추구될 수 있는 다원적인 사회”임을 이해했어야 했습니다.
2024년 12월 3일 윤석열이 계엄 포고라는 ‘뻘짓’을 저질렀을 때 저는 얼굴이 뜨뜻해지는 모욕감과 함께 부끄러움과 안타까움이 뒤섞인 복잡미묘한 감정이 들었습니다.
그때 터져나온 저의 한마디는 “아! 이런 모지리”였습니다. ‘이런 모지리가 우리 대통령이었던 거야?’ 재임 기간 중 온갖 독단과 기행, 비리 등으로 공격을 받았지만, 최소한 ‘모지리’ 대통령이라는 인간적인 모멸이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계엄이라니요.
윤석열은 세상을 전혀 모르거나, 무감각하거나 아니면 ‘학습 지진아’가 분명했습니다. 학생들 모두가 미 · 적분을 하고 있는데 여전히 산수에서 헤매고 있는 꼴입니다.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며 독재를 졸업하고 건강하게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고 있다고 전 세계에서 찬사를 받고 있는 나라에서 군인들을 동원한 계엄이라니요.
서두에서 이야기한 칼 포퍼의 ‘비판’과 ‘서로 상충하는 의견’은 비난과 무질서로 이해하고, 그런 의견들이 ‘자유롭게 표출’되고 ‘엇갈리는 목표들이 다양하게 추구’되는 것을 무책임이라고 이해하니 답이 없습니다. ‘모지리’라는 단어가 부적절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우리의 대통령님’은 애초부터 민주주의가 지향하는 다양성과 다원성이라는 개념조차 이해를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듯 평균 이하의 비상식적인 자가 대통령으로 군림하고 있던 차에 기괴하게도 계엄이라는 ‘뻘짓’ 조차 저지르고 말았으니, 대한민국의 평균적인 시민들이 얼굴이 뜨뜻해져서 여의도로 광화문으로 나가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영화 대사로만 여겼던 “넌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가 현실화 되어 수백 만개의 ‘응원봉’이 탄생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계엄선포’ 한 달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 충격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 치고 있습니다.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모습도 있습니다.
대한민국 평균 이하 ‘모지리’는 아직 용산에 또아리를 틀고 있고, 그를 찬양하는 ‘모지리’ 무리들이 기괴한 깃발을 들고 거리를 활보하고 있습니다.
행여 그들에게 밉보일라 전전긍긍하는 정치인들, 이도 저도 아닌 훼설(毁說)들을 늘어놓고 국민들을 현혹하려는 속칭 ‘언론인’들, 부역자들, 안테나를 높이 올리고 복지부동하는 자들이 도처에 있습니다. 그런 자들을 보고 있노라면 과연 우리나라에 미래가 있을까 싶습니다.
그러나 역사의 발전을 이루어낸 사람들은 그런 자들이 아니었음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고, 고단하지만 우리가 감당해야 할 몫임도 알고 있습니다. 오로지 대한민국의 희망을 위해서요.
”사고의 개방을 존중하고, 자기 교정이 가능하며 반대를 허용하는 비판적 합리주의를 추구한다. 새로운 규칙과 제도를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이 있고, 반증 될 수 있는 사회가 열린사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