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대형 걸개그림 ‘민족해방운동사’ 제작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유죄를 선고받았던 애니메이션 감독 전승일 씨(60)가 34년 만에 재심을 받게 됐다.
대법원 형사1부(주심 서경환 대법관)는 지난 5월 28일, 검찰이 전 감독의 재심개시 결정에 불복해 제기한 재항고를 기각했다. 이에 따라 전 감독에 대한 재심 절차가 공식적으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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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6. 8. 본 기자와 인터뷰하는 전승일 감독 |
전승일 감독은 서울대학교 재학 시절 민중미술 연합 동아리 ‘청년미술공동체’와 ‘전국대학미술운동연합’ 소속으로 활동하며, 1989년 총 길이 77m에 달하는 ‘민족해방운동사’ 그림 제작에 참여했다. 해당 작품은 동학농민운동, 항일무장투쟁, 한국전쟁, 4·19혁명, 부마항쟁, 광주민주화운동, 6월항쟁 등을 담은 총 11폭으로 된 대형 걸개그림으로 한국 현대사를 시각적으로 표현했으며, 서울대학교를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순회 전시되었다.
그러나 1989년 6월 29일 한양대학교 전시 도중 경찰의 무력 진압으로 작품이 파손, 탈취되었고, 당시 공안당국은 해당 작품을 이적 표현물로 간주해 전 씨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했다. 전 씨는 1991년 징역 1년에 자격정지 1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전 감독은 1993년 사면 복권되었고, 2007년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공식 인정받았지만, 실형 전력으로 인해 교수 임용이 취소되는 등 불이익을 겪었다. 특히 당시 강제 연행과 19일간의 불법감금, 고문 등으로 인한 트라우마 후유장애(PTSD)와 공황장애로 30년 넘게 고통받아 왔다고 밝혔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공익인권변론센터는 “국가의 불법 구속과 가혹 행위에 기초한 유죄 판결은 반드시 바로잡아야 할 사안”이라며 2024년 6월 10일 재심개시를 청구했다.
전승일 감독은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1989년 8월 24일, 서울대 인근 녹두거리에서 임대차 보증금을 받으러 가던 중 갑자기 안기부 요원 7~8명에게 집단구타 당하며 강제로 연행돼, 국가안전기획부 남산 지하 밀실에서 19일간 불법 구금된 상태에서 신체적·정신적 고문과 가혹 행위를 당했다”라고 증언했다.
전 감독은 이 사건이 단순한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이 아니라,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예술과 표현의 자유가 심각하게 침해된 중대한 사건이라며, “1994년 국립현대미술관 <민중미술 15년>전에서 ‘민족해방운동사’ 걸개그림 중 4점이 복원되어 실물이 전시된 것만 보더라도 ‘민족해방운동사’는 이적 표현물이 될 수 없다는 확고한 반증”이라고 강조했다. “조속한 재심을 통해 정의가 회복되길 바란다”라고 밝혔다.
그는 또한 “국가보안법에 의한 국가폭력 피해자들의 정신적, 심리적 트라우마 고통과 상처에 대한 국가의 사과와 보상도 반드시 필요하다”라고 강조하며, “국민주권에 기반을 둔 정부의 정의로운 조치를 기대한다”라고 말했다.
전 씨는 걸개그림 ‘민족해방운동사’의 복원과 국립현대미술관 전시, 공공미술 아카이브화 등을 문화체육관광부가 앞장서 추진해줄 것을 촉구했다. 또한, 향후 재심일정이 확정되면 문화예술인들을 중심으로 무죄를 지지하는 연대가 확산되기를 기대한다고 전했다.
한편, 전승일 감독은 현재 파주시 월롱면에 거주하며 ‘오토마타 공작소’ 대표로 독립 애니메이션, AI 필름, 미디어아트, 키네틱 아트 등을 연구·창작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