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에서 종택 순례를 마치고 영주 부석사를 거쳐 봉화군 물야면 가평리의 계서당으로 향했다. 영주에서는 비를 맞았는데, 봉화에 오니 직선으로 내리 꽂히는 8월의 태양이 뜨거웠다. 좁은 농로를 지나 몇 채의 집 가운데 계서당이 있었다. 지난 봄 사찰순례 하면서 봉화의 축서사에서 템플스테이 하고 들렀던 곳이어서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집 앞에 논과 텃밭이 있는 전형적인 시골 마을이다. 대문 옆 담에는 아직도 성이성과 춘향이에 관한 글과, 암행어사 출두 할 때 읊었던 금준미주시(金樽美酒詩)가 걸려 있었다. 댓돌을 올라가 높직한 마루에 올라 앉아 또 찾아왔노라고 인사하니 종부가 전처럼 직접 끓여 낸 차를 권한다. 종손 성기호씨는 농사 일 틈틈이 계서당의 해설을 하는데, 집 안과 밖을 두루 설명하고 성이성의 이야기도 자세히 들려주었다.
계서당은 청백리(淸白吏)로 녹선 된 조선중기의 문신 계서(溪西) 성이성(成以性 1595-1664)이 광해군 5년(1613년)에 건립한 가옥으로, 1984년 중요민속자료 제171호로 지정되었다. 6칸 규모의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마당을 사이에 두고 중문간채와 연결된 사랑채가 정면으로 자리 잡고 있으며, 사랑채 뒤에는 Π자형(字形)의 안채를 배치하여 정침(正寢)은 전체적으로 튼 口자형(字形)의 배치형태이다. 정침(正寢)의 우측에는 사당(祠堂)이 있고, 사당의 주위에는 방형의 토석담장을 둘러 별도의 공간을 이루었으며, 전면에는 사주문을 세워 사당으로 출입할 수 있게 하였다. 사당 옆 보호수로 지정된 소나무는 비스듬히 기우러져서 받침대로 받쳐 놓았다. 성이성과 함께 수령이 오래된 이 소나무의 기를 받으면, 시험에 합격할 수 있다고 하여 많은 사람들이 소나무를 가슴으로 안고 소원을 빌고 간다고 한다.
춘향전의 남자주인공 이몽룡으로 알려진 계서 성이성은 남원부사를 지낸 부용당 성안의(成安義)의 자제(子弟)이다. 인조 5년(1627) 문과에 급제한 후 진주부사 등 6개 고을의 수령을 지냈으며, 네 차례나 어사로 등용되었다. 사생활과 마음이 검소하여 훗날에 부제학을 추서 받았으며 청백리로 녹선 된 실존 인물이다. 춘향전의 암행어사 출두에서 암행어사 이몽룡이 읊었던, “금준미주는 천인혈이요, 옥반 가효는 만성고”라는 시는 성이성이 직접 쓴 시로, 4대 후손 성섭이 지은 교와문고 3권에 수록되어 있고, 성이성의 직계 후손들은 춘향전에 나온 '금준미주 천인혈'은 그가 실제로 지은 한시라고 주장한다. 성이성은 호서지방 암행어사와 호남지방 암행어사로 활동하며, 부패 수령들을 봉고 파직시켰다. 이것 역시 춘향전의 소재가 된다. 학맥으로는 김굉필의 손제자이자 그의 학맥을 계승한 강복성(康復誠)의 문인이다.
<금준미주시(金樽美酒詩)>
金樽美酒千人血(금준미주천인혈)
금잔의 맛 좋은 술은 천 백성의 피요,
玉盤佳肴萬性膏(옥반가효만성고)
옥쟁반의 기름진 안주는 만백성의 기름이니.
燭淚落時民淚落(촉루락시민루락)
촛농이 떨어질 때 백성들이 눈물 쏟고,
歌聲高處怨聲高(가성고처원성고)
노래 소리 높은 곳에 원망 소리도 높더라
1648년 여름, 성이성은 전라도 담양군수로 부임하여 장마철에 강둑이 범람해 피해가 큰 것을 보고 2년에 걸쳐 제방을 쌓고 그 위에 나무를 심었다. 현재 관방제림으로 불리는 숲이 그가 남긴 치세의 흔적이다. 푸조나무, 느티나무, 팽나무 등 184그루가 전한다. 제방에 나무를 심으면 나무가 바람에 흔들릴 때 제방에 해롭다 하여 심지 않았는데, 성이성은 비바람에 강한 토종나무를 골라 심었다. 담양군에서는 현재 관방제림 성이성은 어려서부터 공부를 게을리 하다가 뒤에 강복성(康復誠)의 문인이 되었다. 강복성은 사림의 학통인, 길재, 하지 않고 학문에 더욱 증진하여 조경남의 문하에서 김숙자, 김종직, 김전의굉필(金宏弼), 조광조, 이연경(李延慶)의 학통을 계승한 학자였다. 1607년(선조 40) 남원부사로 부임한 아버지 성안의를 따라 갔다가 그곳에서 만난 기생과의 일화가 후일 춘향 뼈대가 되었다. 그러나 아버지 성안의가 참의로 발령되면서 기생 춘향과는 이별하게 된다. 이때 시중에는 성이성과 춘향을 소재로 한 춘향전이 희극과 인형극, 만담 등으로 확산되었는데, 양반가의 자제의 스캔들이라 하여 조선조정에서 관을 시켜서 금지하게 되자, 성몽룡을 이몽룡으로 바꾸고, 성씨(姓氏)가 없던 기생인 춘향에게 성씨 성을 붙여서 시연하게 된다. 1616년(광해군 8년) 성이성은 사마시 양시에 합격했는데, 생원시에 합격하여 생원(生員)이 되고, 그 해에 다시 진사시에 합격하여 진사(進士)가 되었다. 그러나 광해군 때의 난세에는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에 산책로를 조성하여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성이성은 외직으로 진주부사, 강계부사 등 네 고을을 다스렸다. 그가 진주부사로 재직할 때, 경상도 암행어사로 파견 되었던 민정중(閔鼎重)이 그의 선치(善治)를 왕에게 보고하여 왕으로부터 옷감을 하사 받기도 하였다. 강계부사로 있을 때에는 여진족의 약탈과 흉년으로 어려움에 처한 강계의 백성들에게 인삼세(人蔘稅)를 면제해주어 백성들이 기뻐하며 ‘부처가 환생하여 돌아왔다’고하며 '생불' '관서활불'(關西活佛)이라며 칭송하였다고 한다. 1664년(현종 15)에 향년 70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그는 인조5년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 홍문관 교리, 응교를 역임하였다. 39세에는 사헌부 감찰, 예조좌랑, 사간원 정언에 제수되었다. 43세에 경상도 진휼어사, 호서 암행어사로 나섰으며 45세에는 병조정랑, 교리, 사간 등으로 배명 받았으며, 46세와 53세에 호남 암행어사 등, 네 차례에 걸쳐 어사를 지냈으며 46세에 합천현감, 54세에 담양부사 59세에 창원부사, 60세에 봉화로 돌아왔다. 61세에 진주목사, 66세에 강계부사 등, 다섯 고을에 대한 선정을 베풀자 고을민들은 송덕비로 답례하였다. 1660년 평안감사 임의백이 '관서지방의 살아있는 부처'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