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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주시청사 |
지금은 옛 비디오 테잎을 재생하기 어렵게 되었다. 모든 게 디지털화된 세상이다 보니, 예전에 찍은 사진 필름도 인화하기 어렵다. 그런데 민간 기록으로서 공적 가치가 있다면 파주시중앙도서관 기록관리팀에 옛 비디오 테잎이나 사진 필름을 맡겨 “고가의 필름 스캐너”로 스캔해 디지털 자료로 받을 수 있다. 참고로, 파주시중앙도서관 기록관리팀은 민간 기록, 마을 기록 등의 수집 업무를 하고 있다.
기자는 약 30년 전 경의선 전철 풍경을 찍은 사진 필름을 기록관리팀에 맡기고자 문의했다. 그런데 이 서비스를 이용하려면 ‘디지털 변환 신청서’에 사인을 해야 했다. 그 신청서에는 다음과 같은 무시무시한 문구가 적혀 있었다.
“이 기록물에 대한 공개 및 이용에 관한 권한을 파주시에 위임합니다.” -기록물 디지털 변환 신청서 및 이용 허가서
그러니까 시민이 파주시중앙도서관 기록관리팀에 옛 비디오 테잎이나 사진 필름을 맡겨 디지털 자료로 변환하면, 그 디지털 자료의 이용 권한을 파주시에 넘긴다는 것이다. 이뿐만 아니다. 신청서에는 디지털 변환한 기록물을 파주시가 “활용・열람이 가능하다”는 문구도 있다.
참 이상했다. 그래서 주변에 신청서를 보여주었다. 이 신청서를 본 파주시의회 최창호 의원은 “말이 안 된다. 문제가 있다.”라고 잘라 말했다. 박은주 시의원은 “사용할 때 소유자의 동의를 개별적으로 받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또한 신청서를 본 파주시 김순현 대외협력관도 “공익적 목적이 있다고 해도 남의 그림, 사진, 글 등을 공공기관이 마음대로 가져다 쓸 수는 없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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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시중앙도서관 기록관리팀의 기록물 디지털 변환 신청서 및 이용 허가서 |
담당 공무원의 모순된 답변
“저희가 저작권자가 아니기 때문에 저작권자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
파주시중앙도서관 기록관리팀의 이서영 사서는 “파주의 민간 기록물을 수집하기 위해 서비스를 제공해 드리는 것”이라고 취지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했다. 이어 “원본을 보관하겠다는 건 아니고 복사본만 소장하겠다고 것”이며, 그것을 “나중에 2차 가공을 해서 사용할 수 있다”고 설명을 이어갔다. “그래서 ‘동의서’를 받는다”고도 했다.
이러한 설명을 듣고서 기자는 “공개 및 이용에 관한 권한을 파주시에 이임”한다는 신청서의 문구를 언급하며 “이런 문구가 있는 신청서에는 사인할 수 없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또한 “그러면 나중에 사용할 때 저작권자의 동의를 받지 않는가?” 하고 따져 물었다. 그러자 이서영 사서는 “저희가 저작권자가 아니기 때문에 저작권자에게 동의를 받고서 사용해야 한다”는 ‘올바르고 마땅한 대답’을 했다. 즉 ‘신청서의 문구와 모순된 답변’을 했다.
이에 “모순된 말을 하고 있으며, 지금 이 신청서는 위법의 소지가 있다”고 지적하자, 담당 공무원은 “어!” 하고 잠시 머뭇거리다가 잘못을 인식했다. 이어 “신청서를 수정하는 것이 맞다”고 답변했다. 또한 “신청서를 수정해서 결재받고 다시 연락 드리겠다”고도 말했다.
그러나 2시간 뒤, 담당 공무원은 태도가 돌변했다.
다짜고짜 “‘동의서’에 사인하지 않으면 필름 스캐너를 사용할 수 없다”는 말만 했다. “신청서에 문제가 없다고 보는 것인가?” 하는 질문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또한 왜 갑자기 태도가 바뀌었냐는 물음에도 아무런 답변을 하지 않았다.
기록관리팀 팀장 “기증 신청서로 바꾸는 걸 검토”
결국 담당자를 넘어 기록관리팀의 양태성 팀장과 통화했다. 양 팀장은 사업의 취지에 대해 “기증을 받는 것”이라고 담당자와는 강조점이 다르게 말했다. 또한 문제의 문구에 대해서도 “공익적 목적으로 시민들과 무상으로 공유하겠다는 것”이라고 설명하며 “저작권을 가져가는 거라고 보기는 힘들다”고 답했다.
그리고 문제의 신청서는 “국가기록원의 기증 양식을 따라서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런 설명에 다시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디지털 변환 신청서’는 ‘기증 양식’과는 당연히 달라야 한다! 기증을 받는다면 기증자와 ‘기록물 기증 협약서’를 체결해야 한다! 또한 기증자에게 적절한 예우를 표해야 한다.
그래서다. “그렇다면 디지털 변환 신청서가 아니라 기증 신청서(협약서)라고 해야 맞지 않나?” 하고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양태성 팀장은 “기증 신청서로 바꾸는 걸 검토해 보겠다”고 답변했다. 또한 저작권 침해 소지에 대해서도 “앞으로 검토해 보겠다”고만 말했다.
‘민간기록물 수집 및 관리 등에 관한 규정’ 지키지 않아
문제의 본질은 주민을 대상화하는 것
기록관리팀은 필름 스캐너를 이용해 ‘사본’을 수집하고 있다. 참고로, 국가기록원도 민간 기록을 수집하고 있다. ‘민간기록물 수집 및 관리 등에 관한 규정’을 보면, 사본을 수집할 때 “사본 수집 시 해당 기록물을 소장한 개인 또는 단체 등과 사용 권한 또는 이용 제한에 관한 사항 등을 협의하여야 한다.”고 정하고 있다(25조 3항). 권고가 아닌 강한 의무 규정이다.
파주시중앙도서관 기록관리팀이 챙겨야 하는 사항이다. “이 기록물에 대한 공개 및 이용에 관한 권한을 파주시에 위임합니다.”는 문구가 버젓이 적혀 있는 현재의 신청서는 사용 권한 협의 의사도 없으며, 소장자의 기록물 이용 제한 권리를 보장하지 않고 있어 문제다.
그런데도 같은 문장을 대하는 태도가 왜 이토록 다른 걸까? 같은 문장을 보고서 시민과 관공서 공무원의 온도 차이가 왜 이토록 큰 걸까?
(협)아카이빙네트워크연구원 원장인 손동유(한남대) 교수는 “공공기관에서 그런 식으로 수집하면 안 된다.”고 지적하며 문제의 본질로 성큼 들어간다. 손 교수는 “이른바 마을 아카이브라고 표현하는 것 중에 공공기관에서 시민들을 대상으로 해서 기록물을 가져가서 마을 아카이브라고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주민들이 주도해서 자발적으로 아카이브를 하는 것이 진정 마을 아카이브다. 이 두 경우가 완전히 성격이 다르다. 그런데 이걸 퉁 쳐서 마을 아카이브라고 부르고 있다.”고 설명한다. 이어 “소유권과 지적 재산권을 자기들(관)이 가져가고, 주민들을 제공의 대상으로만 설정하고 있다. 그것을 마을 아카이브라고 하는 게 영 어색하다.”고 비판한다.
공무원은 시민을 대신해서 일하는 사람, 시민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시민을 주체가 아닌 대상으로 여기는 것은 잘못이다. 나아가 문제가 있다는 걸 인식하지 못한다는 점, 그리고 문제가 있다는 걸 인식한 공무원은 입을 닫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는 점이 진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민간 기록은 관 주도로 하는 것이 아니라 주민의 자발적인 활동이어야 한다는 본질을 잊지 말아야 한다. 파주시중앙도서관 기록관리팀은 공무원의 본분을 잊지 않고 민간 기록의 본질에서 벗어나지 않는 성숙한 자세를 보여야 한다. 시민이 지켜보고 있다.